HANGUL.WIKI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과정

The June Democracy Movement of 1987

번역 제공
2,137자 · 2026-05-21
목차 (6개 섹션)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과정

6월 민주 항쟁(六月 民主 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다.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 학생·시민·노동자가 함께 일어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이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역사적 배경: 전두환 정권과 억압의 시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후, 1980년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과 '서울의 봄' 진압, 광주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전두환은 1981년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고, 간선제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 통폐합, 정치인 활동 금지, 학원 프락치 사건 등 전방위적 탄압을 가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 요구는 점점 거세졌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정치적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6월 항쟁의 직접적 도화선

1987년 6월 항쟁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두 가지 사건이었다.

첫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이다.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고문 중 사망했다. 당국은 처음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해명을 내놓았다가, 고문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국적 공분을 샀다. 이 사건으로 반(反)정권 감정이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둘째, 4.13 호헌 조치다.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현행 헌법(간선제)을 유지하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여야 협상 중이던 개헌 논의를 일방적으로 중단한 것으로, 국민적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낳았다.

결정타는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었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그는 7월 5일 결국 사망했다). 이 사진이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 사회의 이목도 집중되었다.

6.10 국민대회와 전국 시위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주도한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 전국 24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되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시위는 중단 없이 이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 추방 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33개 도시에서 약 100만 명이 참가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로 발전했다. 학생뿐 아니라 회사원, 가게 주인, 부인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참여로 저항은 전 사회적 성격을 띠었다.

정부는 군 투입을 검토했으나,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제 사회의 강한 압력과 미국의 반대 의사 표명으로 유혈 진압을 실행하지 못했다. 군사 정권이 무력으로 시위를 분쇄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6.29 민주화 선언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핵심 내용은 ① 대통령 직선제 개헌, ② 김대중 사면·복권, ③ 언론 자유 보장, ④ 지방 자치 실시 등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결국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선언을 계기로 시위는 종결되었고, 1987년 10월 직선제 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6월 항쟁은 군사 독재에 맞서 비폭력 대중 운동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점에서 세계 민주화 운동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특히 중산층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운동의 성공 요인으로 분석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4.19 혁명(1960), 5.18 광주 민주화운동(1980)과 함께 3대 민주화 운동으로 위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이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로 분열되어 결국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실질적인 정권 교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민주주의적 절차는 확보했지만 군부 세력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연장한 것이다. 이 점에서 6월 항쟁을 '미완의 민주화'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문서 정보

최초 작성
최종 갱신
분량
2,137자 (성인 기준)
분류
한국 근현대사 사건

HANGUL.WIKI가 정리·작성한 문서입니다. 정확성을 위해 노력하나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내용은 공식 출처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내용의 오류나 정정 요청은 오류·정정 신고로 알려주시면 검토 후 반영합니다.